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혼란 시대 (문단 편집) == 경과 == 훗날 가짜로 판명되어 [[가짜 드미트리]]로 불리게 되지만 당시에는 사실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는 죽지 않았고 류리크 왕조를 부활시켜 러시아를 통치해나갈 것이란 믿음이 퍼져 있었다. 이에 드미트리를 자칭하는 인물의 등장은 보리스에게도 큰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이에 드미트리를 자칭하는 인물이 가짜임을 증명하기 위해 나섰으나 되려 역공을 당해 오히려 보야르와 민중들이 ~~[[왕의 귀환]]~~ 진짜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가 돌아왔다고 믿게 되는 상황까지 악화되고 말았다. 결국 차르와 가짜 드미트리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으나 1604년에 보리스가 사망하면서 내전은 일단락됐다. 보리스가 사망한 이후 그의 아들이 차르를 계승했으나 민심은 이미 가짜 드미트리에게 쏠려있었다. 결국 차르의 군대도 깃발을 바꿔들어 가짜 드미트리를 지지했으며 결국 보리스의 아들이 살해당하면서 차르위는 가짜 드미트리에게 넘어갔다. 그렇게 러시아에 다시 평화가 찾아오나 했으나…… 가짜 드미트리는 차르위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원을 받은 전력이 있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가짜 드미트리를 모시는 사람들 중에는 [[폴란드인]]이 많았고, 폴란드인 귀족가의 여성과 결혼하는 등,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입김 아래에 놓일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모스크바 대공국 시절부터 대립하던 경쟁국이었고[* 원래는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러시아가 루스의 패권을 두고 서로 충돌했지만, 러시아가 리투아니아를 압도하자 [[폴란드 왕국]]이 리투아니아를 원조하여 리투아니아-러시아 분쟁에 끼어들었다.], 러시아인 보야르들은 이러한 사태에 반감과 우려를 가지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평민 출신이었던 [[리투아니아인]] [[예카테리나 1세]]와 그녀의 직계 후손들이 [[러시아 제국]] 제위를 대대로 계승하게 되었다.] 결국 당시 보야르들의 실세였던 바실리 슈이스키는 현재 드미트리가 가짜임을 주장하면서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 때, 처음 가짜 드미트리 1세를 인정했던 '''진짜 드미트리'''의 어머니였던 마리아 나가야는 바실리 슈이스키와 손을 잡고서 가짜 드미트리를 가짜라고 말을 바꾸었다.], 1605년 가짜 드미트리를 살해하면서[* 얼마나 폴란드-리투아니아와 가짜 드미트리에게 열 받았는지 가짜 드미트리를 죽이고 난도질한 후 '''시신을 대포속에 집어넣고 폴란드 쪽으로 발사했다.'''~~니들 쓰레기는 니들이 치워라~~] 스스로 차르 [[바실리 4세]]가 되었지만, 바실리 4세의 배경도 보리스 고두노프에 비교하면 별다를 바 없었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바실리 4세의 가문인 슈이스키는 류리크 가문의 방계이긴 하다. 하지만 방계 계승을 인정 안하는 러시아 혈통법상 당연히 정통성이 떨어젔다.] 이로 인해 나라 꼬라지를 보고 열이 뻗힌 [[국가 막장 테크|백성들과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런 혼란이 계속되는 와중에 다시 드미트리임을 자칭하는 인물(가짜 드미트리 2세)이 등장했다. 심지어는 자신이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진 이전 드미트리라고 주장했는데 실제로는 외모나 목소리까지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하지만 바실리 4세를 인정하지 않던 세력들은 그런 사항을 잘 알고 있음에도 기꺼이 그의 존재를 인정했다(…)[* 아니나 다를까 또 진짜 드미트리의 어머니인 마리아 나가야가 나타나서 가짜 드미트리 2세를 자신의 아들이라 인정 해주어 그쪽에 힘을 실어주었다. 권력욕 때문에 그랬다는 설이 유력한데, 정말 이른 나이에 죽은 드미트리에게는 자기 애비를 자칭하는 두 명의 가짜를 인정한 것은 상처가 깊은 일이었을 것이다.]. 바실리 4세는 이 골치아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웨덴 국왕]] [[칼 9세]]에게 원조를 요청했고, 칼 9세는 켁스홀름(Kexholm)[* [[핀란드어]]로는 캐키살미(Käkisalmi). 당시의 [[카렐리아|카렐렌]] 방면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현재 러시아의 [[프리오제르스크]].]을 얻는 대가로 바실리 4세를 지원했으나, 이에 가짜 드미트리 2세를 지원하고 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이를 빌미로 국왕 [[지그문트 3세 바사|지그문트 3세]]가 직접 개입[*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군주 지그문트 3세는 본래 스웨덴 바사 왕가의 사람으로 아버지는 스웨덴 국왕 [[요한 3세(스웨덴)|요한 3세]]였고 어머니 [[카타지나 야기엘론카]]가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의 딸이었기 때문에 [[야기에우워 왕조]] 단절 후 선거군주제로 전환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위에 오를 자격이 있어서 이모부 [[스테판 바토리]] 사후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덕분에 잠시나마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스웨덴의 군주'''였다가 [[스웨덴]]의 재가톨릭화 정책에 대한 반대를 명분으로 본인이 스웨덴 왕위를 차지하려던 숙부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일으킨 반란으로 스웨덴 왕위에서 폐위당한 상황이었다. 지그문트 3세는 당연히 숙부가 칼 9세로 즉위한 것을 인정하지 않아 폴란드-스웨덴 관계는 악화되었고 칼 9세가 죽고 그 아들인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즉위한 상황에서도 자주 전쟁을 벌였다.]하여 러시아로 군대를 파견했다. 바실리 4세는 러시아-스웨덴 연합군 3만을 거느리고 침입한 폴란드군을 격퇴하려 했으나 클루시노 전투에서 폴란드 헤트만 스타니스와프 주키에브스키(Stanisław Żółkiewski 1547~1620)[*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의 명성에 가려져서 그렇지, [[스테판 바토리]] 시절부터 군대를 지휘한 명장이었다. 나중에 [[제2차 빈 공방전]]에서 [[빈(오스트리아)|빈]]을 구원하는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외증조할아버지이다.]가 이끄는 5천의 [[윙드 후사르]]에게 그야말로 개발렸고, 이 패전으로 인해 차르위에서 폐위된 다음 쫓겨났다.[* 쫓겨난 바실리는 전리품으로서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로 압송, 지그문트 3세 앞에 무릎을 꿇는 치욕을 당하고 강제로 수도승이 되어 바르샤바 근교의 고스티닌 성에 유폐되었다가 1612년 사망했다.] 이후 러시아 귀족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와 협상을 진행하여 지그문트 3세의 맏아들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브와디스와프 왕자]]를 새로운 차르로 선출했다. 한편 당연히 차르위를 물려받을 것이라 생각했던 가짜 드미트리 2세는 강력히 반발했지만 모스크바에 입성하지 못하고 쫓겨났다. 결국 모스크바에서 밀려난 이후 지방에서 계속 기회를 엿봤으나 부하의 배신으로 암살당했다. 이후 가짜 드미트리 1세의 아내이자 가짜 드미트리 2세의 아내였던 [[마리나 므니셰흐]]가 전 남편의 아들 작은 악당 이반을 지도자로 추대했으나 결국 토벌당했다. 작은 악당 이반을 비롯하여 체포된 인물들은 대부분 처형당했으며 마리나 므니셰흐는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하다가 1614년에 옥사했다. 한편 러시아 귀족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와 협상하면서 내건 조건은 "브와디스와프가 정교회로 개종한 다음 차르위에 오른다", "러시아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 "가톨릭을 강요하지 않는다"였다. 브와디스와프 자신은 정교회 개종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지그문트 3세가 극렬히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지그문트 3세에게 있어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가톨릭 방어의 보루인 동시에 가톨릭 포교의 교두보였기에 들어줄 수 없는 조건이었다.] 여기에 스웨덴 역시 브와디스와프를 차르로 지명한 것을 빌미로 1610년부터 러시아를 공격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가짜 드미트리임을 자칭하는 세번째 인물이 나타나 스웨덴, 폴란드-리투아니아, 러시아 국경 지역인 [[프스코프]]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우기도 했다. 결국 [[러시아인]]들은 침략자로부터 조국을 지켜내기 위해 저항할 수 밖에 없었으며 1612년에 간신히 폴란드-리투아니아 세력을 축출할 수 있었다. 이후 1613년 [[이반 4세]]의 사돈 가문인 [[미하일 1세|미하일 로마노프]]를 새로운 차르로 선출하여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세력을 몰아낸 뒤에도 차르위를 노리는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배반 행위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스웨덴의 새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공격으로 위기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1617년 스웨덴에게 이전에 약속했던 켁스홀름에 더하여 [[발트해]]로 향하던 유일한 출구 [[잉그리아|이조라]](Ижора)[* 현재 [[러시아]]의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있는 [[레닌그라드 주]] 일대의 역사적인 지역으로 주로 [[정교회]]를 믿는 핀란드계 민족인 [[이조라인]]이 거주했다. 보통은 라틴어 명칭인 잉그리아(Ingria)로 알려져있으며 [[스웨덴어]]로는 잉에르만란드(Ingermanlamd)로 표기한다.]를 할양하고, 1618년에는 데울리노 조약으로 폴란드에게 [[스몰렌스크]]와 [[체르니히우|체르니고프]], 세베리아를 할양하여 양국가를 달래면서 간신히 최악의 시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브와디스와프는 계속 차르위를 주장했고 러시아는 빼앗긴 스몰렌스크를 되찾고 싶었다. 결국 휴전 기간이 끝난 1632년 미하일 1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침공했으나 대패했다.[* 러시아가 스몰렌스크에 파견한 주력군이 폴란드 구원군에게 전멸했다. 폴란드는 스몰렌스크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는 공세를 펼쳤지만 러시아 군대는 수비에 성공했다.] 아무튼 폴란드에게 수도를 점령당하고 영토까지 뭉텅 떼주는 등 제대로 굴욕을 당한 러시아는 폴란드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고 대홍수 때 굴욕을 갚아주며 이후 [[폴란드 분할]]로 [[러시아 혁명]] 전까지 폴란드를 철저하게 짓밟았다. 스웨덴 또한 [[대북방전쟁]]과 1741년 전쟁으로 탈탈 털어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